<<박홍규 | 영남대 교수·법학>>
힐링이니 교육이니 건강이니 교양은 물론 심지어 종교나 예술이나 학문까지도 모든 게 예능에 의하고 여야 정치인들까지 등장하여 야단법석이니 바야흐로 한국은 예능만능국이다. 최고 인기 직업도, 아이들의 희망 직업 1순위도 예능인이다. 각본대로 하는 사적인 놀이를 리얼 버라이어티니 하며 진짜로 오해하게 만드는 예능을 또 어디에서 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핀란드에서는 볼 수 없다. 가족이 오후 5시 전후로 모두 귀가하므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것들이고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1위가 토론, 2위가 뉴스, 3위가 다큐멘터리로 모두 진짜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반면 그것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없는 것들인 한국에서는 가짜인 예능이나 게임이 최고 인기다. 예능이 아예 없는 핀란드에서는 게임도 아이들 폰에서는 금지될 뿐 아니라 아동에게 유해한 모든 것이 철저히 금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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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들이 읽기와 수학에서는 핀란드와 마찬가지로 세계 최상위이면서도 핀란드와 달리 자기 주도 학습능력에서는 최하위이고, 학습효율도도 1위인 핀란드와 달리 24위에 머무는 것이 이러한 경향과 무관할까? 핀란드 아이들이 세계 최고의 학업 성취도, 자기 주도 학습 능력, 학습 효율성을 보이는 데는 텔레비전을 비롯해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학구적이고 토론 등을 통한 논리적 대화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익히며 그것이 바로 수업에 연결되는 까닭도 있다. 대학 수업은 물론 초·중·고 수업도 열띤 토론 수업이 주인 핀란드와, 초·중·고는 물론 대학에서도 토론이 거의 없는 한국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한국과 핀란드 교육의 근본적 차이를 흔히 경쟁과 강제, 자유와 자치의 유무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차이는 그런 토론을 통한 소통의 유무다. 이는 교육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핀란드에서는 10명 전후의 한 반에서 교사가 주도하는 수업은 하루 한 시간뿐이고 나머지 수업은 서너 명씩 토론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직도 교사 주도 수업 중심이고 한 반의 학생 수도 여전히 많다. 특히 우리 대학의 수업이 그렇지만 핀란드에서는 시험이 없고 토론 결과를 적은 리포트를 제출하고 그 내용도 인터넷에서 베끼는 수준이 아니다. 핀란드에서는 의무교육이 끝나는 중3 때 치르는 딱 한번의 시험 외에 시험은 없고 그것도 9년간의 의무교육을 정리하는 것이지 그 위의 상급학교 입학이나 취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핀란드의 교육이 최고인 것은 누구든 모르는 것을 남기지 않도록 수업을 하여 모두가 공부를 좋아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공부라는 것을 잘하는 아이는 물론 잘 못하는 아이도 잘하도록 한다는 것이 핀란드 교육의 목표다. 아이 때만이 아니라 평생토록 교육은 중시되어 성인의 교육 참여율은 세계 최고고, 도서관 및 박물관 등의 이용률도 한 달에 1회 이상으로 세계 최고다. 사회보장도도, 환경지속성도 세계 최고다. 교육처럼 어떤 국민도 가난을 이유로 불행해서는 안되고, 누구나 건강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보장과 환경 지속성을 각각 보장하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권력자나 부자보다 교사가 존경을 받는다. 우리의 삼성전자에 해당하는 노키아 회장은 그곳 사장이 아니었으면 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회장들은 과연 어떨까? 노키아의 핀란드는 유럽에서 폰 보급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지만 우리와 달리 학교를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폰을 사용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즉 셀프폰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흡연처럼 공공장소에서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당연한 국민 상식이다. 따라서 내 것이니 언제 어디에서나 멋대로 사용하고 큰 소리로 할 수 있다고 하는 한국의 상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핀란드에서 가장 흔히 듣는 소리는 ‘조용히 해’다. 부모도 교사도 아이들에게 항상 그렇게 가르친다. 공중도덕이 중요한 반면 핀란드만큼 프라이버시 존중이 철저한 나라도 다시없다. 

공직자의 불륜이라는 것도 직무와 직접 관련되어 문제가 되지 않는 한 절대로 문제 삼지 않는다. 더욱이 정치적 보복을 위해, 사실 확인도 안된 10여년 전의 일을 황색언론을 통해 폭로하고 여론몰이로 공직자를 해직시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사적 원한을 공적 정의로 날조하는 짓은 절대로 없다.

공과 사의 구분에 대한 상식이 다른 점은 복지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동의 성장이나 노령으로 인한 생존도 사적인 능력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제도로 국민 모두에게 보장해야 할 인권문제이므로 16세 이하와 65세 이상에 일괄 지급하는 아동수당과 양로연금, 그리고 폐질연금, 출산수당, 빈민수당 등의 각종 사회보험은 1945년부터 시행됐다. 이와 함께 주40시간제와 1개월의 연가제 등 노동조건의 완비로 인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를 이룩해 노사화합을 이루는 데 텔레비전의 토론을 비롯한 언론의 기여가 컸다. 반면 우리는 예능을 비롯한 바보상자의 날조된 가짜의 강요로 인해 교육도 복지도 노동도 정치도 바보들의 행진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정치를 비롯한 모든 것이 공사 혼돈의 바보짓으로 가짜를 진짜로 오인하게 만들고, 그것이 불통의 파시즘을 낳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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