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 중국 여성의 비애, 전족(纏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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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년 촬영된 “너무 작은 다리” 

 

 

‘두 발로 서고자 하나 넘어지고 마네. 

가늘고 고와 아마도 어려울 것 같으니, 

손바닥 위에서나 보아야겠네.’ 

 

중국 송나라 때의 대표적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7 ~ 1101)가 전족(纏足)을 한 여인의 자태를 아름답게 표현한 시구다. 

전족은 중국 송나라 때 무희들이 신던 작고 뾰족한 신발을 상류층 부녀자들이 모방해 신으면서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독특한 풍습이다. 어릴 때부터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발가락을 안으로 바짝 구부린 채 고정시켜 발을 기형적으로 작고 굽게 만들었다. 이상적인 크기가 9∼10㎝였다니 세상이 원하는 ‘아름다운 발’을 만들기 위한 여성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미루어 짐작하기도 힘들다.
 
  

 

중국 고대에는 세 가지의 性적 의미를 가지는 기형적 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창기(娼妓)와 환관(宦官) 그리고 여성의 전족(纏足)이다. 이 중, 창기나 환관은 외국에서도 존재했지만, 여성의 전족은 중국만의 것이었다. 옛날, 서양인이 아편에 중독 된 중국인으로 인해 '동방의 병든 남자'라는 뜻의 「동아병부(東亞病夫)」이라고 생각했을 때, 항상 “중국 남성들이 앞부분만 깎고 뒷부분은 길게 땋아 늘인 머리카락(辮髮; 변발)과 여성의 전족(纏足)” 이 「중국은 우매(愚昧)로 뒷걸음친다」라고 하는 말의 심볼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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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발(辮髮)을 다듬는 모습

변발(辮髮)이란 두발(頭髮)을 땋아 늘인 머리모양. 편발(編髮)·승발(繩髮)·삭두(索頭)라고도 하며, 유목민족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도록 승(繩:먹줄)과 같이 땋음으로써 얻은 명칭으로 주로 북방 민족의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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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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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의 전족여성들의 당시의 풍습 

 

宋代 말기, 사회에서 「큰 발은 부끄럽다」라는 기풍이 왕성하게 번지고 있었다. 明代가 되어서는, 전족의 기풍은 더욱 심각해져, 당시의 유행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여자가 유아 때 발을 천으로 감아 조그만 구두를 신겨서 후천적으로 교정하여 기형으로 만들어 버리던 풍습으로 성인이 된 후에도 발이 10㎝ 정도의 크기 밖에 안된다. 발뒤꿈치에서 발끝까지 약10cm가 이상적이라고 하며, 모양에 따라 춘순(春笋: 봄 죽순), 금련(金蓮: 여자의 예쁜 발을 형용하는 말)이라고도 하였다. 한걸음 나아가 고대 중국미인의 10대 조건에는 연보소말(步小襪)이란 말이있다. 연보란 전족을  작은 발을 말하며 소말은 그것을 싸는 일종의 조그마한 양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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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楊貴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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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시에(궁혜; 弓鞋) 

중국에서 전족을 한 여자가 신던 작은 외코 가죽신 

 

전족(纏足)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수나라(581~618년) 혹은 당나라(618~907년)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나라 양귀비(楊貴妃)는 구두크기가 10㎝도 안 되는 전족을 했다고 전해지며 전족 ’3貴의 美’는 ’肥(비), 軟(연), 秀(수)로 肥는 지방이 있어서 윤기가 흐르는 것, 軟은 부드러워서 살집이 좋은 것, 秀는 모양이 아름다운 것을 의미한다. 

 

전족의 구체적인 방식은 가늘고 긴 포대(布袋)로, 여성의 다리의 복사뼈를 확실히 묶고, 이것으로 근육의 형태를 변화시켜,다리의 형태를 정상적으로 성장시키지 않고 작은 채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심미안(審美眼)에 일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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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과 담배갑의 크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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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을 한 발의 형태-마치 여성의 구두같다.


 

그 시대, 대부분의 여성이 4세, 5세부터 전족을 시작해 성년이 되면 뼈의 형태가 정형(定型)이 되어 있으면, 포대를 풀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일생 전족이었던 여성도 있었다. 또한 이「세치금연(三寸金蓮)」이라고 불리는 작은 다리는 가장 프라이버시한 부분으로, 절대 모르는 남성에게 보여져선 안 되었다. 

실생활로 여러가지 불편이 있을뿐만 아니라 , 전족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성은 심한 아픔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전족’의 고통과 그를 위해 뼈를 삭히면서 까지 매일 발을 동여맨, 여성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중국 여성들은 매일 두 발을 통해서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편견속에 출세와 아름다움을 위해 참고 또 참아왔다.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며 생활에 있어 엄청난 불편을 주었던 전족을 중국의 여인들은 왜 천여년에 걸쳐서 유지 하였던 것일까? 

 

첫째 심미관(審美觀)에 의한 작은 발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비정상적인 세태는 당시 사람들이 전족을 여성 미의 필수적인 요건이나 심지어는 제일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도록 몰고 갔다. 둘째 예교관(禮敎觀)으로 중국의 고대사회에서 신분제도와 종법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제정된 예의규범과 도덕표준이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가득 차 있다. 셋째, 기형적 성욕의 발현으로 문인들이 비뚤어진 심미관으로 여성의 작은 발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으면서 그것이 사회 전반의 미적기준으로 확산이 된것이다. 기형적인 전족을 두고 세치금련(三寸金蓮)이라고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대며 수많은 미사어구를 달아 댄것도 바로 이들이다. 

 

위의 세가지 외에도 얘기되어 지는 전족의 이유는, 남자들이 잘 사는 경우 몇명씩이나 첩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 못사는 경우 남자 몇명이 돈을 모아 공동의 처를 겨우 사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속에서 여성의 수가 모자라므로 달아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발을 못쓰게 했다는 얘기가 그 하나다. 또 다른 얘기는 발이 작고, 운동은 부족하므로 둔부(엉덩이)가 커질 뿐 아니라 걸을 때 엉덩이를 뒤뚱뒤뚱하며 걷는 모습이 더없이 섹스어필하게 보였다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1894년 서태후가 금지령을 내렸으며 20 세기들어 중화민국(中華民國) 초기가 되어 이 풍습은 점차 폐지되었지만, 1949년 중국이 해방될 때까지, 일부의 벽지 지역에게는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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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의 위험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하이힐 엑스레이 사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도 전족이 있다고한다. 바로 전세계 여성들이 애호하는 하이 힐이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발가락의 희생 정도는 감수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하이힐은 발 앞꿈치와 발가락에 하중이 몰리기에 엄지발가락이 휘면서 통증을 주는 무지외반증에 걸리기 쉽다. 또 앞 코가 뾰족하고 꽉 조이게 되므로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조갑감입증이 생겨 꽤 심한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세계의 의학자들은 하이힐이 현대판 전족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이힐 때문에 장애가 생긴 발을 X-ray로 살펴보면 중국 여성들의 전족한 발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현대판 전족'인 셈이다. 발가락의 기형과 발뒤꿈치 통증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무릎이나 허리 통증을 유발하고, 발목 염좌 및 종아리 근육의 단축을 초래한다.하이힐은 여성의 미를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반면 여성의 자유로움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함에따라 착용시간을 줄여 자신의 건강관리를 하는 센스가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펌>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uid=es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