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 계신 어머니의 몸이 점점 쇠약해져 이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아무리 어머니를 소리쳐 불러 봐도 신음만 날 뿐. 그동안 누구보다도 아껴 온 아들의 목소리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다 신음이 멈춘 순간, 아직 생명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더는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을 만큼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아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가 나게 한 후 이 피 한 방울을 어머니의 입속에 떨어뜨린다. 그러자 잠시 후 생명을 잃어 가던 어머니가 다시 신음을 내며 생명을 유지한다.

 

사극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장면은 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의 하나다. 아들의 피 한 방울을 먹는다고 죽을 병이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우리의 조상은 피를 생명의 상징이라 여길 정도로 소중히 여겨왔다. 피는 과연 어떤 성분을 지니고, 어떤 기능을 하고 있기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져 왔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피가 생명의 상징인 이유, 산소를 온몸으로 전하기 때문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각각의 구성요소 중 어느 하나 덜 중요한 게 없겠지만, 피는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가 중요한 이유는 온몸에서 요구하는 산소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산소를 공급해주는 피가 생명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교통사고와 같이 특별한 사건에 의해 사람의 몸이 큰 충격을 받아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응급처치를 받아야 한다. 이때 응급처치 순서를 결정하는 ABC는 A가 호흡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기도(airway)를 유지하기, B가 출혈(bleeding) 방지, C가 혈액순환(circulation)을 의미한다.

 

숨을 쉴 때 들어온 산소는 피 속에 포함된 적혈구에 의해 운반된다. 산소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통로에 이상이 없어야 하므로 기도유지를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한다. 또 적혈구가 산소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피 속에 적당한 양의 적혈구가 존재해야 하는데, 출혈이 생기면 적혈구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산소를 운반할 수 없으므로, 출혈방지가 두 번째로 해결해야 될 과제다. 아무리 산소가 피 속으로 들어와 적혈구에 결합한다 하더라도 피가 몸을 잘 돌아다니지 못하면, 산소를 필요로 하는 세포나 조직에 산소를 공급할 수 없으므로 피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피가 물보다 진한 이유, 혈구와 혈장 때문이다

피가 물보다 진한 이유는 물에 들어 있지 않은 성분이 피 속에 들어 있는데, 이 성분의 밀도가 평균적으로 물보다 높기 때문이다. 피에 들어 있는 물질을 크게 세포와 세포가 아닌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혈액이란 피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며, 피 속에 들어 있는 세포를 통틀어 혈구라 하기도 한다.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 세 가지 종류의 세포가 혈구에 해당된다. 피에서 세포 성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혈장(plasma)이라고 한다. 혈장은 노란색을 띠는데 그것은 피가 빨간색으로 보이게 하는 적혈구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혈장에는 다양한 기능을 하는 수많은 물질이 녹아 있고, 이 성분과 세 혈구가 하는 일이 바로 피의 기능이 된다. 혈구는 혈액의 약 45% 정도를 차지하고, 혈장은 약 55%를 차지한다.

 

혈장에서 섬유소원(fibrinogen)을 제거한 나머지를 혈청(serum)이라 한다. 피에 녹아 있는 성분 중 피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성분은 대부분 단백질이며, 이를 통틀어 혈청 단백질 또는 혈장 단백질이라 하는데 섬유소원의 포함 여부에 따라 이름이 결정된다.


 

혈청 단백질은 크게 알부민(albumin)과 글로불린(globulin)으로 구분한다. 글로불린은 전기장 내에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알파(α), 베타(β), 감마(γ)로 구분할 수 있다. 피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 중 양이 가장 많은 알부민은 전체 혈장 단백질의 약 60%를 차지하며, 수많은 종류의 단백질이 혼합된 글로불린은 약 35%를 차지한다. 섬유소원은 약 4%를 차지하며, 나머지 1%는 효소, 풋효소(효소전구체), 호르몬과 같이 인체 내에서 조절기전을 담당하는 단백질이다.

 

 

출혈은 인체의 비상사태


피는 온몸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피가 몸 밖으로 흐르기 시작할 때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게 되면, 이론적으로는 우리 몸의 모든 피가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따라서 사고가 났을 때 출혈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며, 피는 몸 밖으로 나오면 응고되어 더는 출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출혈부위를 막는 응고기전이 발달하여 있다.

 

혈액 응고기전은 아주 복잡하고, 혈액이 응고되기까지 10개 이상의 인자들이 제대로 기능을 해야 한다. 이 인자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몸 밖으로 나온 피가 응고되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게 되는데 이를 혈우병이라 한다. 혈우병은 흔히 남성에게서만 생기고 여성에게서는 생기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혈액응고에 관여하는 인자 중 8번 인자가 결핍되는 경우를 A형 혈우병, 9번 인자가 결핍되는 경우를 B형 혈우병이라고 한다. A형 혈우병이 전체 혈우병의  80% 이상, B형 혈우병이 10~15%를 차지하여, 이 두가지 경우가 전체 혈우병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8번과 9번 인자는 그 유전인자가 X염색체에 존재한다. 따라서 여성은 X염색체를 2개 가지고 있으므로, 한쪽 X염색체가 이상이 생겨도 다른 쪽이 보완을 해 주기 때문에 혈우병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X염색체 두개에 모두 이상이 생긴 경우에는 정상적으로 출산되지 않아, 사실상 여성의 경우 8번과 9번 인자 결핍으로 인한 혈우병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성은 X염색체가 하나 밖에 없어 혈우병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서도 X염색체가 아닌 보통 염색체에 존재하는 11번 혈액 응고인자가 결핍되는 경우, 혈우병이 발생할 수 있다.

 

 

피는 우리 몸의 택배 기사

피가 온몸을 돌아다니다 보니, 특정 부위에서 요구하는 특정 물질을 피가 옮겨다 주는 것이 가장 편하므로 피는 운반기능이 아주 발달하여 있다. 산소를 필요로 하는 세포와 조직에 코로 들어온 산소를 운반하는 것도 피가 하는 일이며, 섭취된 음식이 소화되고 나서 작은 창자 벽을 통해 들어온 영양소도 피를 통해 운반되어야 적당한 곳으로 옮겨져 저장될 수 있다. 인체의 내분비샘에서 분비된 호르몬은 혈액으로 들어가야 기능을 하며, 피로 들어온 노폐물은 콩팥의 혈관에 도달해야 걸러져서 소변으로 배출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물질의 운반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피는 여러 가지 운반기능을 발전시켰다. 산소는 적혈구 내에 존재하는 헤모글로빈의 중심부와 결합하여 운반되고, 철∙구리∙레티놀(retinol)과 같은 물질은 이들 각각의 물질과 결합하는 단백질이 별도로 피 속에 존재한다. 피 속에 녹여서 운반하는 것보다는 운반을 담당하는 단백질과 결합하여 운반하는 편이 운송효율이 훨씬 높으므로, 피는 운반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운반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추울 때는 수축하고 더울 때는 팽창하는 혈관, 체온을 조절한다

혈관이 체온조절을 담당한다고 해서 체온조절 중추가 혈관에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체온조절기구의 최고기관인 체온조절 중추는 뇌의 시상하부에 있다. 추울 때 운동을 하면 근육의 수축작용에 의해 열이 발생하므로 그냥 있는 것보다 추위를 이겨내기가 쉬워진다. 근육의 수축작용에 의해 발생한 열은 혈액에 의해 흡수되어 몸에서 열을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재분배된다. 변온동물은 그때그때 체온을 변화시켜 가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사람은 온도가 일정한 정온동물이므로 체온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조절을 잘해야 한다.

 

체온이 낮아질 때 소름이 돋는 것은 피부표면을 통해 방출되는 열을 최소화하기 위해 혈관이 수축함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이며, 혈액은 뇌를 비롯하여 온도에 민감한 기관에 우선하여 흘러간다. 반대로 체온이 높아지면 피부표면 방향으로 혈액이 몰려가면서 열을 방출함으로써 체온을 떨어뜨려 준다.


 

 

혈관의 총 길이는 10만km! 

한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혈관의 길이는 약 10만km에 이른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약 4만km이므로 지구를 두 바퀴 반 돌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수치는 추정치이므로 정확히 재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혈관도 있으므로 정확히 잴 수도 없다. 사람 몸에 들어 있는 피의 양은 체중의 약 8% 정도다. 사람마다 체중에 차이가 있으니 피의 양도 달라지며, 일반적으로는 보통 4~6리터의 피를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의 체격이 과거보다 커지고 있으므로 헌혈 때 뽑아내는 피의 양도 과거에는 320mL였으나, 지금은 남자어른은 400mL를 뽑기도 한다. 피의 비중은 물의 비중이 1이라 할 때, 1.06 정도로 물보다 약간 크다. 그러나 점도는 5배 정도 더 강하므로 끈적끈적함을 느낄 수 있다. 탈수가 일어나면 혈액이 더 진해져서 점도도 더 진해진다. 피의 pH는 7.4 정도로 중성에 가까운 약염기성이다. 이런 다양한 피의 특성에 대해 다음 편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예병일 /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저서로는 [내 몸 안의 과학] [의학사의 숨은 이야기] [현대 의학, 그 위대한 도전의 역사] 등이 있다.[내 몸 안의 과학]은 교과부에서 2008년 상반기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