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해설과 함께하는 춘화

 

 

춘화(春畵)……봄을 그린 그림이라!

 

남녀 간의 성희(性嬉)장면을 묘사한 그림, 춘화는 이렇듯 그 이름에서부터 은유적이고도 예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 봄이란, 아무리 인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 사랑을 시작하고픈 생각이 살짝 불어오는 계절이다. 어느 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과 유혹적 자태의 개나리 사이에서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허나 춘화의 실제 모습은 그 이름처럼 은유적이거나 말랑말랑하지는 않다. 위의 김홍도 그림이 그 중 가장 얌전한(?) 축에 속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춘화는 오늘 날의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와 맞먹을 정도로 매우 사실적이고 또 도발적인 이미지였다. 아마도 그 시절 사람들은 이 춘화를 보면서 현실에서는 충족되지 못한 성적 욕망을 해소시켰으리라. 춘화의 형태는 역사 이래로 동양의 중국, 일본,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제작되어 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性)과 육체적 쾌락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이 시대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얼마나 강렬하게 지속되어 왔는지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제작되어 온 춘화는 각 나라별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중국 춘화는 <소녀경> 등에서 언급된 다양한 성교 체위를 묘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묘사에 있어서도 특유의 정교함과 섬세함이 돋보인다. 또한 일본의 춘화는 우선 강렬한 인상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과장된 성기, 화려한 의상과 가구 그리고 때론 기괴하고 변태적인 속성 등등. 마지막으로 한국 춘화는 문인화적인 품위와 서민적인 소박함 그리고 인간적인 체온이 느껴지는 회화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특히 배경으로 묘사된 자연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사랑 간의 절묘한 조화는, 한국 춘화를 예술적인 것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 춘화 감상>

 

우리나라에 춘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점은 청(淸)을 통해 외국 문물이 한창 들어오기 시작했던 17~1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유교적 도덕관념이 투철했던 조선 상류층에서는, 이 춘화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예로, 인조년에 중국 사절단의 선물 품목에 상아로 만든 남녀 성교 조각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비도덕적이라 하여 다시 돌려보낸 적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의 춘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소비층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자체 제작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김홍도나 신윤복 등 당대의 뛰어난 풍속화가들이 이 춘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춘화는 단지 향락을 자극하는 도색화로 머문 것이 아니라 예술성 또한 뛰어난 하나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원 김홍도의 서명과 낙관이 찍힌《춘화사계첩(春畵四季帖)》은, 배경과 주제의 아름다운 조화와 필치 또한 유려하다는 점에서 높은 예술성을 지닌 하나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단원의 뒤를 이은 혜원 신윤복 또한, 단지 단순한 남녀 간의 성행위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 심리 안에 존재하는 에로티시즘을 반영한 작품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적 욕정을 풍류의 세계로 승화시켰던 조선시대의 춘화는 구한말에 이르러 급속히 퇴락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일본 창녀의 진출과 도시 매음이 번창하면서 일본의 값 싼 춘화가 상당량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그림을 보면 누구나 다 인정하겠지만, 한국의 춘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춘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춘화는 건강하고 아름답다. 우수한 조선시대 춘화의 어디에도 변태적이거나 부조화적인 성은 발견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춘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단원 김홍도의 춘화첩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자연 경물에 음양적 성격을 부여해놓고 있다. 이는 곧 인간의 성을 자연의 섭리, 그리고 생명의 원천으로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된다. 성행위와 조화를 이루는 풍경 묘사의 예리함, 대담하면서도 은유와 해학 그리고 풍류, 그리고 그림을 보며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는 것이 우리나라 춘화만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의 운우도첩에 실린 그림이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한국 춘화는 유희만을 목적으로 하는 포르노물과는 거리가 멀다. 물기가 흥건한 먹으로 묘사된 계곡 입구에는 진분홍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바위와 흙더미가 결합하는 부분은 자연의 음양 이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음부를 닮은 여근곡을 은유적으로 표현,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한 화면에 담은 것이다.

 

이렇듯 깊고 오묘한 김홍도의 사상이 들어가 있어서 그럴까? 담뱃대를 문 여인과 그 여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남자의 살포시 보이는 볼기짝이 외설은커녕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몸짓으로 느껴진다.

 

 

 

 

나뭇가지가 잎을 틔운 화창한 봄날, 어느 정원으로 보이는 은밀한 곳에서 젊은 남녀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했다. 남자는 수려한 용모의 청년이고 여인은 기녀로 보인다. 이 역시 배경과 성행위의 조화가 뛰어난 김홍도의 작품이다. 서로 뒤틀리고 꼬이고 교차하면서 뻗어 올라간 나무, 그 사이에 서로의 몸을 교차시키며 이제 막 삽입을 하려는 두 사람. 그런데 그녀의 앞에 있는 저 노란 색 항아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달빛이 비치고 그 달빛을 온 몸으로 머금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인체의 묘사는 비록 정확한 데생을 바탕으로 하진 않았지만, 행위에 대한 사실감을 잘 살렸다. 배경의 정물들은 이 그림의 주제인 남녀에게로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담채와 수목이 어우러져 담담한 느낌을 준다. 아! 춘화가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욕정을 일으키기 보다는 한 편의 시상이 떠오를 듯하다.

 

 

 

 

초가마루에서 옛 기억을 살려 섹스를 시도하려는 어느 노부부. 부인이 치마를 걷어 올려 남편의 성욕을 부추기지만, 남편은 도무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아, 나도 한 때 잘 나갔었는데!'''''''''''''''' 라며 말을 들어 주지 않는 자신의 남성을 아쉬워하는 장면이다. 한숨과 안타까움이 절로 나오는 성의 노스탤지어라고나 할까?

 

 

 

 

기생집을 찾아온 한량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도 안 닫은 채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장죽을 물고 누워 있는 기녀에게로 달려간다. 성급히 달려가는 그의 몸짓도 우습지만, 한량의 급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반라로 누워 있는 기생의 표정 또한 재미있다. 속고쟁이가 없이 겉치마만 걷어 올려 당장이라도 일을 치를 수 있게 준비를 완료한 기녀의 속셈은 과연 어떤 걸까…. 한국의 춘화는 이렇듯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애로 비디오에 과부들이 단골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춘화에는 파계승들이 자주 등장한다. 섹스 역시 득도의 한 과정일 것일까? 여인을 탐하는 스님의 모습에서 죄책감은커녕 무언가 경건함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은, 바로 스님의 밀교를 엿보고 있는 저 동자승이다. 아……어린 소년의 참을 수 없는 성에 대한 호기심이여!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소복이 물기를 머금은 바위 옆에 역시 소복이 사랑에 취해 있는 두 사람. 서로의 물건을 잡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가 느껴진다. 산수와 인간이 마치 하나가 된 이런 느낌은, 오직 한국의 춘화 특히 김홍도의 춘화에서만 보이는 고품격의 정취라고 할 수 있다.

 

 

 

 

일반 해석에 따르자면 이 그림은, 주인과 여종의 성희장면이라고 한다. 아마도 안방마님은 잠시 출타 중이신 듯……. 주인은 여종의 허리를 높이 들며 삽입과 동시에 가슴을 애무하건만, 이 동시다발적 애무를 받고 있는 여종의 모습은 하염없이 지루하기만 하다. 몇 번의 회유의 협박 끝에 이루어진 섹스, 여종은 이제 모든 걸 체념한 듯 마음대로 하라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다.

 

 

 

 

한국 춘화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쓰리썸 장면이다. 서로 겹쳐있는 두 여인들 중의 한 여인의 뒤를 향해서 남자가 페니스를 삽입하고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파격적인 이 장면. 그런데도 이 그림이 그리 난잡하거나 퇴폐적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들의 등 뒤에 아름답게 묘사된 배경의 힘이 아닐 런지.

 

 

 

 

신윤복 춘화의 특징은, 인간의 심리 안에 존재하는 에로티시즘을 끄집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김홍도의 그것보다 섹시하고 관능적이며 직설적이다. 성과 자연의 조화보다는 인간의 성 그 자체에 집중했기 때문에, 인물 표정의 묘사나 체위가 보다 다채롭다.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독특한 체위를 구사하고 있는 젊은 두 남녀는, 지금 온전히 그들의 사랑 그리고 그들의 몸에 집중하고 있다.

 

 

 

 

쭈그렁뱅이 노인과 아직 머리도 올리지 않은 어린 여인. 주책일 수도 있고 장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의 표정을 보면 절로 유쾌한 웃음이 나온다. 노인은 약간 미안해하면서도 여인을 향해 너그러운 웃음을 보내고 있다. 여인 또한 수줍게 손을 가리고 있는 것이 싫지만은 아닌가 보다. 역시 사랑과 섹스는 국경도 없을뿐더러, 나이도 없다.

 

 

 

 

흠칫! 그 어느 춘화에서도 남성의 엉덩이가 이리도 육감적으로 묘사되진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남성의 엉덩이와 그 아래로 살짝 보이는 페니스가 여성의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이 짓누르고 있다. 남성의 성을 과장되게 묘사함으로서 ''''''''''''''''아! 나도 저렇게 여자를 지배해 보았으면!'''''''''''''''' 하는 욕망을 부추기려는 심리가 아니었을까?

 

 

 

 

이 그림은 신윤복이 춘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 그림이다. 독특하고 관능적인 체위, 여자의 옷을 완전히 벗기지 않음으로 더 끓어오르는 열정 그리고…… 긴 머리와 자신의 가슴을 늘어뜨리고 이 광경을 바로 엿보고 있는 한 여인네. 오호라! 신윤복이 이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야말로 색계를 능가하는 영화를 만들고도 남았으리라!

 

 

 

* 본 컨텐츠를 전재할 때는 타오러브 출처를 꼭 밝혀 주십시오.
 ⓒ www.taolov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