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의 ‘꽃이 진다하고…’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평론가․서예가, 중부대교수)

 

   중종의 첫째 계비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둘째 계비 문정왕후는 명종을 낳았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대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소윤이라 한다.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했다. 그해(1545)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모반죄로 몰아 형조판서 윤임․좌의정 유관․이조판서 유인숙 등 10여명을 죽였다. 이후 5,6 년에 걸쳐 100여명이 유배 혹은 처형되었다. 이를 을사사화라 한다.

   이렇게 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비분강개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송순이 시조 한 수를 지었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휘짓는 봄을 새와 무슴 하리오

 

   송순의「을사사화가」이다. 어떤 잔치 자리에서 기녀가 이 시조를 불렀다. 소윤의 일파인 진복창이 이 노래를 들었다. 그는 누군가를 비방하기 위해 분명 이 노래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녀에게 누가 지었느냐고 캐물었다. 기녀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필화를 당할 뻔 했다.

   얼핏보면 꽃이 지고 봄이 가는 것을 슬퍼하는 「상춘가」로 보일지 모르지만 속뜻은 그렇치 않다.


‘꽃이 진다고 새들아 슬퍼하지 말아라. 바람에 못 이겨 흩날리는 것이니 꽃의 탓이 아니로다. 떠나가느라고 훼방하는 봄인데 이를 어찌 미워하겠느냐’는 것이다.


꽃이 진다는 것은 죄 없는 많은 선비들의 죽음 뜻한다. 새들은 이러한 세상의 꼴을 바라보고 있는 백성들이다. 바람은 을사사화를, 꽃은 선비들을 지칭하고 있다. 휘짓는 봄은 득세한 소윤 윤원형의 일파를 말한다. 


새와 무삼하리오는 이를 어쩌겠느냐하는 것이다. 탄식과 체념이 섞인 당시의 사회상을 대변해주고 있다.


   송순(1493,성종 24- 1582, 선조 15)은 면앙정가단, 강호가도의 선구자로 담양 출생이다. 본관은 신평, 자는 수초, 성지 호는 기촌 또는 면앙정이다. 1519년 (중종 1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홍문관부제학,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전주 부윤, 나주목사 등을 지냈고 70세에 기로소에 들었다. 1568년 (선조 1) 한성부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했으며 77세(선조 2)에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50년 만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송순은 선조의 부름을 받았지만 14년 동안 면앙정을 오르내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송순은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강직했다.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탓으며 또한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이었다. 벼슬살이 50년 동안 단 한 차례 서천에서 1년 6개월을 귀양살이 했을 뿐이었다. 이황은 그를 일컬어 ‘하늘이 낸 완인(完人)’이라고 했으며 송강 정철은 ‘조정에 있는 60여 년을 대로만 따랐다.’고 흠모했다.

   송순의 문학은 고향인 담양 면앙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박순 같은 선비들이 면앙정을 찾아와 시를 짓고 학문을 연마했다. 면앙정은 호남 문학을 찬란하게 꽃피운 누정문학의 산실인 호남 가단의 중심 무대였다.

   면앙정의 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정자의 터는 원래 곽씨 소유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곽씨의 꿈에 금어옥대를 두른 선비들 이 그 터 위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 뒤 곽씨가 자식을 가르쳤지만 크게 되지 않고 집안만 가난해 지자 나중에 송순에게 팔았는데 그 꿈은 과연 면앙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수많은 문인, 학자, 관 료들이 이 곳을 무대로 시를 수작하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익혔기 때문이다.(정병헌 ․ 이지영,『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1999,도서출판 돌베계),241-242쪽.)

 

면앙정(俛仰亭)은 “허리를 구부리니 땅이요, 우러러보니 하늘이라”(俛則地兮仰則天兮)하는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송순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에게 굽어도 부끄럽지 않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孟子』 盡心章)”라고 다짐으로 지은 이름이다.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면앙정에서 열렸다. 회방연은 과거에 급제한지 60돌 되는 잔치이다. 공의 나이 87세였다. 국왕도 꽃과 술을 하사했다. 정철, 기대승, 임제를 비롯 관찰사, 고을 원님 등 수많은 명사들이 모여 회방연을 축하해주었다. 송순이 침소에 들려고 했을 때 정철이 ‘선생의 남녀를 직접 메어드리자’고 제안했다. 이에 고경명, 임제, 기대승이 일시에 일어나 가마를 태워 송순을 옹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

 

풍상이 섞어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이온냥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어느날 명종이 황국을 분에 담아 옥당관에게 주며 시를 지어올리라고 했다. 옥당관이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당황했다. 마침 참찬으로 숙직하고 있던 송순에게 부탁하여 시를 지어올렸다. 임금님이 놀라며 이 시를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옥당관이 송순이 지었다고 말했다. 왕이 감탄하여 송순에게 상을 내렸다. 이것이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일명 「옥당가」라고 한다.

   옛 선인들은 서리에도 꼿꼿하게 피는 국화를 군자의 덕에 비유했다. 이 시조에는 어떤 역경에 처해도 국화와 같이 기개있는 선비가 되어 달라는 임금님의 뜻이 들어있다. 이에 복사꽃, 오얏꽃처럼 쉬 변절하는 일 없이 지조를 지키는 신하가 될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송순은 왕의 마음을 이렇게 잘 읽어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10년 간 애써서 초가삼간 마련했지만 문틈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지붕 틈으로는 달이 보인다. 한간은 내게, 한간은 달에게 또 한간은 청풍에게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가 없으니 병풍처럼 둘러두고 보겠다는 것이다.


   안빈낙도의 경지이다. 

초가삼간에 청풍과 명월 그리고 강산까지 들여놓고 사는데 무엇이 부러우랴.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가난하지만 즐기지 못할 뿐이지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 많다. 그는 이렇게 자연과 함께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는 「면앙정 삼언가」,「면앙정제영」등 한시 505수, 국문시가 「면앙정가」9수, 시조 20여수 등을 남겨놓았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으며 담양 구산사에 배향되었다.

   천수를 누리며 산 이도 흔치 않지만 일생 관운이 좋은 이도 흔치 않다. 온후하면 강직하지 못하고, 강직하면 온후하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데 송순은 온후하면서도 강직했다. 보이지 않는 위대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 『월간서예』(미술문화원,2011,2),148-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