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라는 액자

창의 건축적 정의는 ‘방 안과 밖을 소통하기 위해 벽에 뚫은 구멍’이다. 사람과 밥상이 드나들고 목소리가 들리며 바람이 흐른다. 햇빛도 빠질 수 없는 주요 이용객이다. 소통에는 보는 것도 있다. 경치 감상이다. 창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는 한 평생 사람의 감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환경요인이다. 만약 이것을 보다 본격적이고 의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 집은 사람에게 매우 이로울 수 있다. 한옥이 그렇다. 한옥에서는 창을 창으로 보지 않았다.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액자로 봤다. 한옥에 유난히 창과 문이 많은 이유이기도 한데, 선조들은 집에 앉아서 창과 문을 여닫을 때마다 수없이 다양하게 변하는 풍경을 만들어 보는 놀이를 즐겼다. 그 경치는 물감으로 그린 가짜 평면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3차원 실체이니 풍경화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사실적이었다.

 

 

정여창 고택 사랑채 대청 대청 전면에 집안 전경을 큰 풍경화로 내건 격이니,가문과 집안을 이끌어가며 책임지는 유교다운
가부장에 제격이다.

 

 

차경이다. 말 그래도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가지려 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긴다. 소유해서 벽에 거는 그림과 달리 풍경 요소를 그대로 존재하게 한 뒤 그것을 빌려서 살아있는 풍경화를 그렸다. ‘소유 대 존재’의 화두에서 존재를 선택한 것이다. 붓 한 번 들지 않고 물감 한 번 찍지 않고 실로 다양하게 변하는 수십 장, 심지어 수백 장의 풍경화를 집안 곳곳에 걸어두었다. 하루 시간대에 따라, 일 년 시절에 따라, 또 날씨와 마음 상태에 따라, 그도 아니면 그저 눈길 가는 데 따라, 집안에는 늘 살아 숨 쉬는 다양한 풍경화를 구비해 두었다.

 

창만 있으면 풍경작용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니 특별할 것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넓은 창을 통해 바깥 경치 보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한옥의 풍경작용은 색다르다. “눈만 달리면 본다”는 일반론과는 차원이 다르다. 분명한 의도 아래 아주 치밀하고 섬세하게 기획했다는 뜻이다. 조선 양반들은 한옥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 전시장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도 자신들 계급 권력의 기반을 문(文)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이란 글과 사상이 바탕을 이루지만 풍류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감각놀이를 즐기게 해주는 풍경작용

즐기되, 집의 창문을 액자처럼 활용해서 쉼 없이 변하는 풍경화 수십 장, 수백 장을 집안 곳곳에 걸어놓고 즐긴 것이다. 서양의 귀족도 예술사상을 중요한 통치 기반으로 삼았다지만 이렇게까지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공부만으로는 안 되는 법, 타고난 기질과 직관적 감성, 그리고 국민성 등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국민성은 자잘한 놀이를 좋아하고 다양성을 즐기는 상대주의가 강하다. 나의 바깥에 있는 객체나 자연과 동등한 입장에서 마음을 주고받고 감성을 교류하려는 인생관을 가졌다.

 

풍류에는 난초 정도는 칠 줄 알아야 무릇 양반이라 할 수 있는 예술적 감성도 들어 있었고, 자연과 하나 되어 어깨를 들썩일 수 있는 정신적 여유도 들어 있었다. 이같은 여러 배경들이 합해져 집을 풍류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큰 놀이터로 파악하고 그 가능성을 극대화해 집 곳곳에 심었다. 직접적 풍류는 물론 계곡 속 정자에서 벌일 일이지만, 일상생활 자체를 하나의 풍류로 보았고 집을 그 놀이터로 삼은 것이다.

 

풍경작용을 기준으로 보면 한옥은 참으로 감각적인 집이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온전히 놔두지 않고 감각적으로 즐기기에 제일 좋은 방식으로 창속에 담는다. 굴뚝 하나 건넌방 문 하나도 마찬가지이다. 담과 문, 장독과 댓돌, 기와와 문살, 기둥과 서까래, 눈과 신록, 낙엽과 단풍, 심지어 먼 산과 하늘과 햇빛까지 담을 수 있는 건 모두 담아 즐겼다. 즐기는 방식도 다양하다. 활짝 열어젖히며, 코앞에서 대면하듯, 손을 뻗쳐 애무하듯, 옆으로 삐딱하게, 숨어서 관음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마음을 트듯, 마주보며 호탕하게 웃듯, 어미가 자식을 품에 안듯, 반가운 친구와 악수하듯 끝이 없다. 뭉툭 그려,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관계를 그대로 풍경작용에 옮겨 놓았다. 내 몸이 생활하는 감성의 흐름과 감각의 궤적을 집에 실어서 자연스럽게 집과 하나가 될 때 가능한 일이다.


창덕궁 연경당 안채 5월 맑은 날 낮에 미닫이 문을 액자로 삼아
신록을 풍경으로 담았다.풍경요소와 한층 친밀해져 활기찬 하루를
즐기게 해주는 심리작용을 한다.

 

 

오감의 교류를 살리는 풍경놀이

한옥의 풍경작용은 시각작용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오감으로 가고야 만다. 어쩔 수 없는 한옥의 이치이다. 한옥 자체가 오감 작용이 뛰어난 집이려니와, 풍경작용은 이것이 잘 드러나는 통로이다. 풍경요소가 살아있는 실체라서 오감으로 교류할 수 있다. 부엌이라면 밥하는 냄새가 날 것이고 꽃이라면 향기가 날 것이다. 나무라면 바람소리를 방 안까지 불어 들려줄 것이다. 계절의 냄새를 실어주고 땀을 식혀준다. 마당 가득 찬 햇빛은 풍경을 찬란하게 만들 뿐 아니라 방안까지 파고들어 몸뚱이와 피부에 비벼댄다. 비타민을 선물하고 체온을 올린다. 풍경작용은 이런 것들과 함께 어울리고 온몸의 감각은 희열에 곤두선다. 방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내 손으로 직접 창을 조작해서 풍경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오감으로 흠뻑 즐겨 마음 가득 흥을 채울 수 있다.

 

 

윤증고택 사랑채 1월 눈 오는 날 늦은 오후에 여닫이문을
액자로 삼아 뒤뜰 장독을 풍경으로 담았다.풍경요소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침작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심리작용을 한다.

정여창 고택 사랑채 방 한 사람의 남자로 침잠하고 싶을 때
에는 방에 들어 소박한 풍경을 즐기면 된다.차라도 한 잔 하면
서 센티멘털리즘에 빠질 수 있게 해준다.

 

 

단순히 창 열어서 풍경을 담아낸다고 끝이 아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잔 감각에 유난히 예민하고 세상을 지극히 상대적으로 보는데, 풍경작용에서는 액자 형식을 다양하게 만드는 지혜로 나타난다. 경치를 다양하게 하려다 보면 자칫 풍경요소 자체에 손을 대기 쉬우나 이는 한옥의 지혜가 아니다. 풍경요소는 그대로 놔두고 경치를 담는 액자를 다양하게 한다. 한옥의 구조 골격이 ‘항변’하고 공간이 변화무쌍한 이유이기도 하다. 문의 종류부터 그렇다. 미닫이문은 풍경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 유리하다. 여닫이문은 밖의 풍경에 대해 공간 깊이를 만들기 때문에 형식화 기능에 뛰어나다. 벼락치기 문은 통 크게 경치를 한 번에 확 잡아들인다.

 

정식 문만 문이 아니다. 기둥과 기둥이 양옆에서 한정하면 이것도 액자요, 서까래와 처마는 위에서 한정하니 이 또한 액자이다. 문의 크기와 위치도 제각각이다. 방 구석에 바짝 붙은 손바닥만한 창을 열면 그 격에 맞는 작은 풀 한 그루가 처연한, 그렇지만 너무 위대한 생명을 드러낸다. 이 나무 한 그루와 24시간, 사시사철 벗하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게 해주는 형식의 통로가 풍경작용이다.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는 비밀은 창호지라는 재료에 있다. 반투명으로 가림 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쪽을 열면 소담스런 나무 한 그루가 보이다가 저쪽을 열면 집안의 전경이 드러난다.

 

다양성은 사람의 감성을 돕는다. 감성 상태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의 종류를 항상 구비해놓은 셈이다. 정여창 고택 사랑채를 보자. 대청에 앉으면 집안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내 집 전경을 대청에 풍경화로 걸어놓은 격이다. 유교문명에서 가문과 가족을 책임지는 가부장으로서의 책임과 권위에 합당한 풍경작용이다. 그러나 가부장이라고 늘 목에 힘만 주고 살 수는 없는 일, 때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감상적이 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에는 방에 들어 미닫이문을 열면 소담한 나무 한 그루가 말동무가 되어준다. 풍경을 벗 삼아 내면과 대화할 수 있다. 그래서 정약용은 족자에 대하여 “때때로 바꾸어 걸어야 할 것이다. 봄 여름에는 가을 겨울의 것을, 가을 겨울에는 봄 여름에 관한 것을 걸어야 하며(중략)”이라고 했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