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건축을 하나로 묶는 아름다움  오픈칼럼 / 유익한 정보들

2012/10/2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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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01

 

 

자연의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 뿐 아니라, 

귀로 듣는 소리이기도 하다.

물소리, 바람소리, 빗방울 소리, 새소리….

그 모두가 자연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소리들이다.

 

 

평범한 해안선이나 낯익은 도시의 혼잡도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면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뀐다. 

낯익은 사물들을 낯선 것으로 바꾸어 새로운 감흥과 충격을 주는 것이 현대 예술의 핵심적 수법이라지만,

국의 건축과 정원은 이 수법을 오랜 세월 동안 발전시켜왔다. 

창문을 열면 멀리 아련한 산들이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방 안으로 들어와 자연과 건축이 일체가 된다. 

이러한 수법은 풍경을 빌려온다고 하여 ‘차경(借景)’이라 했다.

자연의 풍광을 즐기려고 세운 정자와 누각은 대표적인 차경용 건축이다. 

동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7칸으로 이루어진 텅 빈 2층 누각이다. 

누각에 올라앞을 바라다보면, 아래로는 유장한 낙동강이 흐르고 위로는 길게 펼쳐진 병산이 보인다. 

‘병산’이란 여러 첩으로 나누어 그림을 그린 ‘병풍과 같이 옆으로 긴 산’이란 뜻이다. 

벽체가 하나도 없이 뼈대만으로 이루어진 건물이기때문에, 옆으로는 기둥과 기둥 사이, 아래 위로는 마루 바닥과 지붕 처마선

사이로 하나의 비어있는 커다란 액자가 만들어진다. 


이 건축적 액자 속으로 강과 산의 경치가 채워지고, 7칸의 액자들이 연달아 기다란 강과 산의 경관을 분할하면서 

연속적으로 펼치게 된다. 이 누각은 7폭의 풍경화를 담은 병풍이 된다.




 

 

세계의 모든 정원은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영국의 픽춰레스크(the picturesque) 정원은 시골의 목가적 풍경을, 이슬람의 정원은사막의 생명인 오아시스를 재현했다. 

반면, 한국의 정원은 굳이 인공적으로 자연의 형상을 재현할 필요가 없었다. 

눈을 들면 온 사방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이기 때문에 어느 부분의 경관을 선택하면 곧 자연 자체가 정원이 되기 때문이다.

최소의 인공을 더해서 자연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한국정원의 목표였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인위적 행위는 금기시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의 본성이기 때문에 위로 솟아나는 분수는 만들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지형을 개조하지도 않았다. 경사지면 경사지에 맞추어 축대를 쌓아 계단식으로 대지를 조성했고, 

평지면 평지에 맞추어 담을 쌓아공간을 만들었다.

 

 

어떤 건축은 아예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부안의 개암사는 아주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이 재건될 17세기 당시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전 국토가 폐허화된 직후여서 대규모로 사찰을 재건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3칸짜리, 아주 작은 법당을 세울 만큼의 재력 밖에 없었다. 

신비하게 생긴 두개의 바위 봉우리 아래에 법당을 앉혔다. 작

은 법당은 마치 뒷산에서 굴러내려온 또 하나의 바위같이 보여, 완벽하게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이 절 앞에 서면 전체적인 황홀한 풍경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감탄의 원인이 자연 때문인지, 인공적인 건물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자연의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 뿐 아니라, 귀로 듣는 소리이기도 하다. 

물소리, 바람소리, 빗방울 소리, 새소리…. 그 모두가 자연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소리들이다. 

 

담양에 있는 소쇄원은 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적 정원이다. 

빼곡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진입로는 대나무 잎새에 사각거리는 바람소리를 듣는 입구 정원이다. 

본격적인 정원에 들어서면 계곡에 흐르는 다양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격하게 부딪히는 물소리,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

 

자세히 살펴보면, 시냇물의 바위 바닥을 파고 깎아 만든 인공적인 소리들이다. 

이 정원의 소리는 모두 인위적으로 선택하고 조정한 것이지만 그 사실을 알아채기 어렵다. 

오히려 원래부터 있던자연의 소리 속에 정원을 만든 것 같이 착각하게 한다. 

소리를 빌려왔기 때문에 ‘차성(借聲)’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자연은 시각적인 동시에 청각적인 존재이다. 

한국의 건축은 자연을 단지 바라보는 시각적 대상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를 들어왔고 온 몸으로 체험해왔다. 

그래서 자연과 건축을,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통합체로 만들어 왔다